믿음은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by 신인훈 posted Jul 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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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은 세상과 타협 하는 것이 아니다.

 

 

       저는 1973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1973년부터 1974년 초에 전 세계적으로 기름 파동이 일어나서 제가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회사가 일을 하지 않고 공장의 문을 닿아버린 상태 이였습니다. 다른 회사에 취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나갈 수도 없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미국에서 돈을 빌릴 곳도 그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하여 취직이 되었으며 그 때부터 참된 믿음생활이 시작 되었습니다. 참된 믿음의 생활을 얼마 동안 하다 보니 저의 바로 위의 형님이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한국에 계시는 형님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 장로님의 아들로서 형님께서 그동안 신앙생활과 부모님께 잘 못했으므로 회개하고 주일 날 교회에가는 신앙생활을  바로 잘하여야 합니다.’ 회답이 없어 얼마 지난 후에 다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형님의 답이 ‘ 너는 미국에 가서 잘 먹고 잘 살므로 성수주일 이야기 하지만 하루 벌어 겨우 살아가는 나에게는  주일날에도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하여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얼마간 지난 후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보낸 편지에 ‘ 너의 형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보았으나 병명을 찾지 못했으며 지금은 시장에도 나가지 못하고 방에서 누워 있다’ 고 하셨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하나님께 형님의 아픈 몸을 낫게 하여 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때 1977년 6월에 뉴욕에서 한국까지 대한 항공 여객기 한 대 전세로(그 당시 칼기가 뉴욕에 오기 전입니다.) 한국까지 한 사람당 666불 (그 당시 일반적으로 한 사람당 1,500불 정도 )요금이 된 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의 형님께 편지로는 마음을 돌리시지 아니하므로  직접 가서 전도하리라 하는 생각이 들어 전 세기로 한국을 가려고 할 때에 저의 아내도  고향이 너무 그립다면 같이 한국에  가고 싶다면서  같이 가자고 하였습니다. 한국에 같이 가자면 그 당시 아들이 7살이며 딸이 3살이므로 네 식구가 같이 가야 하므로 비행기 값이 2,664불이 되어 아내가 친구에게 2,000불 빌려서 한국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비행기는 뉴욕 케네디 공항에서 떠나게 되어 어떻게 와싱톤에서 뉴욕까지 갔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바로 위에 형님이 부모님을 섭섭하게 하신 이유는 1956년 7월에 내가 살았던 시골에 홍수가 나서 논은 거의가 다 떠내려갔습니다. 우리 동네에 소작을 하는 두 집이 살아 갈 길의 막연하여 교회의 장로 이였던 부친께서 ‘내가 홍수를 만나 먹을 것이 없으니 살기 위하여’ 라고 말씀하여 이웃 동네의 교회에 다니시는 사람들에게 장내를 내어(다음에 농사를 지으면 쌀로 갚겠다며 빌리는 것) 주며 반드시 갚겠다고 하여 받아 온 것을 두 집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들이 갚지 못하고 한 집은 강원도 광산으로 가고 또 한 집은 부산에서 고물 장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갚을 길이 없었으며 몇 년이 지나니 이자가 원금보다 더 많아 졌습니다. 그래서 더 기다릴 수 없어 아버지께서 논과 밭을 팔아 대신 갚아 주므로 우리 형제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14살에 대구에 나와서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야간 학교를 다녔습니다. 형님은 시골에 부모님과 같이 있으면서 부모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 도와주다가 자식들은 학교도 보내지 못한 장로가 무슨 장로이냐면서 술을 마시고 술 주전자를 들고 집에 오면 어머님께서 야단을 치시며 다투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5일 마다 열리는 시골 시장에서 무슨 장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음력설이나 추석에 교향에 가면 집안의 할머니들이 너의 아버지는 예수 믿고 남을 도와주다가 자식들을 학교도 보내지 못하고 망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마다 믿음이 없었던 저였지만 저의 속으로는 믿음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으므로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그 자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 다는 생각을 늘 하였습니다.(잠11:25;14:21) 야간이지만 저는 대학을 졸업을 하고 미국에서 대학원까지 하였으며 지금은 세계 여러 곳에서 현지 목사님들을 훈련하여 그들로 자기 지역에서 사역하게 하는 선교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여동생 중에는 우리 마을에서 처음으로 여자가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다시 1977년 한국에 가게 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한국에 가서 형님 집에 갔습니다. 형님은 몸이 아프기 때문에 그 날은 주 중이었으나 시장에 가시지 못하고 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형님 오늘은 시장이 열리는 날인데 왜 시장에 장사하기 위하여 가시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내가 몸이 아픈데 어떻게 시장에 장사하려 가느냐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잠16:9) 창조자 시며 절대자가 계심을 우리는 항상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형님은 장로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바로 믿지 못한 것이 잘 못이며 또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신 아버지를 원망하고 형제를 원망한 것이 형님의 잘 못이며 이번에 이렇게 아픈 것은 하나님께서 형님께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도록  깨닫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잘 못하였다고 회개하고 예수를 잘 믿으면 시장에서 지금 장사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도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이지만 만약 회개하지 아니하고 고집을 피우면 형님의 병은 계속 할 것이며 하나님은 형수님을 아프게 하여 며칠 후에는 하나님께서 형수님을 데려 가실 것입니다. 그러면 형님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였더니 형님은 눈물을 흘리며 내가 잘 못 하였다. 이제부터 나 교회에 나겠다고 하시면서 회개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몸은 회복되었고 다른 직업을 가졌으며 5년 후에는 교회의 장로님까지 되셨습니다.